2010년 2월 22일 월요일

'기본소득' 주장의 허구성 (채만수)

과학에서 몽상으로 사회주의의 발전ㆍ발전ㆍ발전!

[정세와노동]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2010. 1. 27-29)에 부쳐

 

채만수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소장)  / 참세상 2010년02월22일 13시13분

 

I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인 엥겔스는 1880년에 <<공상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이라는 소책자를 썼고, 맑스는 그 책의 서문에서 이를 “과학적 사회주의의 입문서”1)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채 한 세기 반(半)도 격하지 않은 이 시대, 이 오랜 반동의 시대의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교수들, ‘진보적’ 활동가들은 마침내 ‘과학에서 몽상으로’ 사회주의의 위대한 발전을 성취해내기에 이른 것 같다. 여러 ‘진보적’ 학술단체들, ‘진보적’ 정당들, ‘진보적’ 언론들이 후원하고 선전했기 때문에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겠지만, 지난 1월 27일부터 29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이른바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 이야기다.


다름 아니라, 내로라하는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교수들, ‘진보적’ 활동가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와 우리 시대를 둘러싼 낡은 족쇄를 끊어내고 인류가 쟁취해야 할 세계사적 과업을 실천하는 사람들,”2) “19세기 노예제 폐지, 20세기 보통선거권 쟁취에 버금가는 21세기 세계사적 과제로 기본소득 쟁취를 들고 나온 사람들”3)이 우르르 그 소위 ‘학술대회’에 몰려가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해결할 대안”(!), “위기의 폭이 넓고 깊은 만큼” “더욱 근본적이고,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대안”(!),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기초한 구체적인 요구, 대중의 삶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요구”(!)를 외치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이라는 요구를! “기본소득”이라는 대안을!


‘참가자 일동’의 ‘선언’에 의하면, 아니, 그들의 “사고”에 의하면, “기본소득”이란 “세계적 금융위기를 통해 충분히 그 마각을 드러낸 신자유주의 시대를 철저히 종식시킬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본주의와 현존했던 사회주의 모두를 뛰어넘는 대안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은 어떠한 심사나 노동 요구도 없이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조건 없는 소득이다. 기본소득은 기존의 선별적이고 잔여적인 복지 패러다임을 넘어 보편적 복지 패러다임을 완성하는 지렛대이며, 완전고용이라는 가상과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의 전일화로부터 탈피하여 노동사회를 안팎으로부터 재구성할 촉매제이다. 기본소득은 단순히 현금소득으로 다른 모든 것을 대체하려는 시도도, 분배의 개선만으로 다른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시도도 아니다. 기본소득의 보편적 성격은 그것에 기존의 소득들과는 다른 새로운 힘을 부여하며,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들을 만들어낸다.


새삼스레 느끼는 바이지만, 아- 인지(人智)의 위대함(!)이여! 장기간의 대반동의 파괴적 위력이여! 게다가 그 “필요성과 정당성에 공감”할 뿐만 아니라 “그 가능성과 현실성 또한 충분히 고려하고 있”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천해왔”다니, 한없는 찬사와 존경을!


II

우선 나는, ‘선언’의 ‘참가자 일동’이 자신들을 “기본소득을, 세계적 금융위기를 통해 충분히 그 마각을 드러낸 신자유주의 시대를 철저히 종식시킬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본주의와 현존했던 사회주의 모두를 뛰어넘는 대안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로 사고하는 사람들”로 규정하는 대목을 특히 주목한다. 바로 이 대목에야말로 저들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교수들, ‘진보적’ 활동가들의 몽상뿐만 아니라 저들의 기만과 사기, 그리고 필시 제기될 비판을 ‘오독(!)에 기초한 비판ㆍ비난’이라고 맞받아칠 간교한 장치가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령 없이 거듭 중복되는 인용에 양해를 구하면서 하는 말이지만, 방금 본 것처럼, 저들은 자신들이 얘기하는 이른바 “기본소득 쟁취” 혹은 “기본소득 ... 제도화”를 “우리와 우리 시대를 둘러싼 낡은 족쇄를 끊어내고 인류가 쟁취해야 할 세계사적 과업,” ““19세기 노예제 폐지, 20세기 보통선거권 쟁취에 버금가는 21세기 세계사적 과제,”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해결할 대안,” “위기의 폭이 넓고 깊은 만큼” “더욱 근본적이고,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대안,”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기초한 구체적인 요구, 대중의 삶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요구”로 규정한다. 그러면서도 바로 뒤에서는 간교하게도 이를 “...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로 사고” 운운하고 있다.


이렇게 “기본소득을”, 아니, 보다 정확히는 저들이 주장하는 “기본소득 쟁취” 혹은 “기본소득 ... 제도화”를, “대안사회” 그 자체의 기본적 분배제도가 아니라, “... 대안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로 사고”한다고 할 때, 저들이 아무리 “글로벌 시대의 지속 가능한 유토피아와 기본소득”4) 운운하더라도 그것을 과학이 아니라 망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오독에 기초한, 비판 아닌 비난”이라고 되받아칠 근거를 저들은 갖게 된다. “현재의 자본주의와 현존했던 사회주의 모두를 뛰어넘는” 것은 고사하고 “세계적 금융위기를 통해 충분히 그 마각을 드러낸 신자유주의 시대”가 생생하게 살아 있더라도 저들은 당당한(?) 변명의 근거를 갖게 된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염치 불구하고, “우리는 단지 ‘대안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로 사고’했을 뿐”이라고 능히 변명하고 되받아치고도 남을 위인들이니까 말이다.


III. ['기본소득 서울 선언' - 비판 6]

펼쳐두기..

 

IV

‘대회’에 즈음하여 발표한 ‘기본소득 서울 선언’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처럼, 저들은 자신들이 “기본소득을, 세계적 금융위기를 통해 충분히 그 마각을 드러낸 신자유주의 시대를 철저히 종식시킬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본주의와 현존했던 사회주의 모두를 뛰어넘는 대안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로 사고”하고 있으며, 그 “필요성과 정당성에 공감”할 뿐만 아니라 “그 가능성과 현실성 또한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저들 모두는, “현재의 자본주의와 현존했던 사회주의 모두를 뛰어넘는 대안사회”니, “사회주의[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실현]”이니, “현 체제를 뛰어넘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니, “현 체제를 뛰어넘는 이상”이니 하는 따위의, 그야말로 자신들의 본심을 은폐하기 위한 기만적 허사(虛辭)를 제외하고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폐지하려는 어떤 방안이나, 하다못해 당위성ㆍ필요성조차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온존시키려 하고 있고, 그를 위해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온존시키고도 노동자들이나 노동자단체, 사회운동단체들이 ‘기본소득’을 이해하고 강령적으로 채택하기만 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온존시키고도 누구에게나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 보장될 것 같은 환상을 유포하려고 하고 있다. 결국 저들의 주장에 의하면, ‘기본소득’의 보장은 생산관계의 변혁과는 무관한 분배관계의 변혁의 문제인 것이다.


이수봉 민주노총 대변인의 글에서 본 것처럼 과학 및 ‘과학주의’와 더불어 맑스와 맑스주의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지고 그리하여 반동적으로까지 된 “근대주의적 이데올로기”로 거부ㆍ매도되고 있고, 적잖은 수의 천재들, 곧 대반동기의 자식들이 “맑스를 넘어선 맑스”를 자처하고 있지만, 나의 비판은 역시 맑스와 맑스주의에 입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인용하건대, 맑스는 예컨대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 이른바 분배를 가지고 소란을 떨고 그것에 역점을 두는 것은 대체로 오류였다.

어떤 시대에나 소비수단의 분배는 생산조건 자체의 분배의 결과에 불과하다. 그러나 생산조건의 분배는 생산양식 자체의 한 특징이다.54)


속류사회주의(그리고 그를 본받아 민주주의자의 일부)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로부터, 분배를 생산양식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고찰하고, 취급하고, 따라서 사회주의를 주로 분배를 중심으로 하는 것처럼 설명하는 방식을 이어받고 있다.55)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은 ... 그것이 특수한 종류(Art)의, 특정한 역사적 규정성을 지닌 한 생산양식이라는 것, 다른 모든 특정한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어떤 주어진 단계의 역사적 생산력과 그 발전형태를 그 역사적 조건으로서 전제하는데 그 조건이란 그 자체가 선행한 과정의 역사적 성과이고 산물이며 거기에서 그것을 주어진 기초로 하여 새로운 생산양식이 나온다고 하는 것, 이러한 특정한 역사적으로 규정된 생산양식에 대응하는 생산관계― 인간이 그들의 사회적인 생활과정 속에서, 그 사회적 생활을 생산하면서 들어가는 관계 ―는 하나의 특정한, 역사적인, 그리고 경과적인(vor"ubergehenden)성격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배관계는 이 생산관계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그 뒷면이고, 그리하여 양자는 동일한, 역사적으로 경과적인 성격을 공유한다는 것을 입증한다.56)


그리고 엥겔스도 이렇게 얘기한다.


[뒤링이 결국,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전적으로 좋아서 지속될 수 있지만, 자본주의적 분배양식은 쓸데없는 것이며 폐지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데에 대해서: 인용자] 생산과 분배의 관계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경제학에 대해서 쓰면 이러한 정신 나간 소리(Unsinn)를 하게 된다.57)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58) 뒤링의 경제학은 결국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전적으로 좋고 계속 존속할 수 있으나, 자본주의적 분배양식은 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소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제로 귀착된다. 이제 우리는 뒤링 씨의 ‘공정사회’(Sozialit"at)란 이 명제를 공상(Phantasie) 속에서 실행한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있다. 사실상 명백해진 것은 뒤링 씨는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양식―본래의 의미에서의―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 그는 낡은 분업을 모든 본질적인 면에서 유지하려고 하며, 따라서 또한 그의 경제적 코뮌 내부의 생산에 관해서는 거의 한 마디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생산은 물론 단단한 사실들이 다루어지는 영역이며, 따라서 수치(羞恥)를 안길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합리적인 공상’이 그 자유로운 영혼을 날개 치게 할 여지를 단지 조금만 주는 영역이다. 그에 반해서 분배는, 뒤링 씨의 견해에 의하면, 생산과는 물론 전혀 관련이 없으며, 그것은 그에 따르면 생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의지행위에 의해서 규정되기 때문에 ― 분배야말로 그의 '사회적 연금술'을 위해 숙명적으로 예정된 영역이다.59)


이들 인용문들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부연설명도 필요 없을 만큼 그 자체로서 명확하다. 그리고 특히 엥겔스로부터의 마지막 인용문은 ‘뒤링 씨’를 ‘기본소득론자들’로, “‘공정사회’(Sozialit"at)”를 ‘기본소득’으로 바꾸어 읽는다면, 그야말로 정확히 ‘기본소득’을 설교하는 저들 ‘진보적’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물론 상당 정도의 사회보장제도가 작동하고 있는 서유럽이나 북유럽의 체제를, 즉 이른바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외면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 사회는 분명 자본주의 체제이지만 우리 사회는 물론 자본주의 세계의 다른 대부분의 국가사회보다도 훨씬 더 ‘기본적 복지’가 보장되어 있는 체제이다. 여기에서도 저들 소위 기본소득론자들은 자신들 주장의 잠재적 현실성, 그 실현 가능성을 강변하고 싶을지 모른다. 이렇게 외치면서 말이다. ― “보라, 자본주의 체제의 존속을 전제한다고 해서 ‘기본적 복지’의 보장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우리가 지향하는 바는 바로 그보다 불과 몇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서유럽과 북유럽의 저 소위 사회민주의의 체제는 과연, 저들이 암묵 중에 상정하는 것처럼, 탁상의 산물로서 그것을 획득하려는 운동 속에서, 그러한 운동의 성과로서 형성되고 발전되어 온 것이던가? 결코 아니지 않은가?


저들 소위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분명 그 사회의 노동자계급이 사회민주주의적 복지제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려고 혁명적으로 진출한 결과이며, 노동자들이 그렇게 혁명적으로 진출하는 조건 속에서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점자본가계급이 어쩔 수 없이 후퇴한 결과일 뿐이다. 1930년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그리고 특히, 1930년대에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반적 위기와는 정반대로 승승장구했고, 제2차 대전기에는 나찌 독일의 침략과 파괴ㆍ살육에 대항하여 2000만 명 이상의 희생을 치르는 대전쟁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성장ㆍ발전하던 사회주의 쏘련을 보면서, 그 사회의 노동자계급이 혁명적으로 진출한 결과인 것이다. 바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진출, 그리고 그러한 혁명적 진출을 자극한 사회주의 쏘련의 존재와 그 발전이야말로 저들 소위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형성되게 된 원인이자 배경이었던 것이다.


이 점은 노동자계급의 성형과 발전, 그리고 그 정치적 운동의 역사가 길고 쏘련에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었던 유럽에서 사회보장제도가 가장 튼튼하게 형성되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나아가 이 점은 또한 이후 소위 사회민주주의 체제의 ‘발전’과 관련해서도 의미심장하다.

1950년대 후반 이후 자본주의 선진국가들의 노동자계급은 그 사회보장제도에 안주하고 매달리며 그 혁명성, 전투성을 상실해갔다. 쏘련은 수정주의로 빠져들어 갔다. 그리고 이들 조건에 힘입어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 기구는 쏘련을 악의 제국으로 낙인찍는 데에 성공했다. 이렇게 되자 저들 사민주의적 사회보장은 답보하고 약화되기 시작했다. 노동자계급이 혁명성을 상실하고 사민주의적 사회보장제도에 안주하여 그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쏘련이 후루쇼프 이래 수정주의의 득세로 그 사회주의가 약화되면 약화될수록, 그리고 그러한 조건 속에서 독점자본의 그리고 ‘좌익’ 반쏘분자들의 반쏘 악선전이 대중을 포획하면서 쏘련이 악의 제국으로 낙인찍히면 찍힐수록, 저 사민주의적 사회보장제도는 약화ㆍ해체되어 갔던 것이다. 물론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가 해체된 이후 그 약화ㆍ해체는 속도를 더해왔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그러나 저들 소위 기본소득론자들은 저간의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거나, 어렴풋이 알면서도 그 불치의 반동성 때문에 이를 결코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그러면서 ‘기본소득’이라는 또 하나의 몽상, 또 하나의 몽상적인 사민주의 정책ㆍ운동으로 독점자본 지배의 이 대반동의 시대를 역전시킬 수도 있다는 듯이 노동자 대중을 기만하면서, 그들을 독점자본의 재단에 제물로 바치려 하고 있다.


진보적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이여, 제발 사기 좀 작작 처라! 그리고 부끄러워할 줄 알라!

 

Notes 1~59

 

펼쳐두기..


 

댓글 1개:

  1. 기본소득을 둘러싼 쟁점과 비판 / 박석삼(진보전략회의), 2010년03월21일 21시41분,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6040

    답글삭제